괜찮다는 거짓말, 아티클 세줄소설
괜찮다는 거짓말
미디어가 지워버린 효
언제부턴가 세상의 모든 따스한 불빛은 오직 한쪽으로만 쏟아지고 있다. TV를 틀어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영상 광고나 거리의 대형 빌보드를 보아도 온통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고 축복하라는 이야기뿐이다. 만삭의 임신부에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는 온정이나 아이를 낳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파격적인 혜택과 지원금 그리고 다자녀 가족을 향한 국가적인 대우와 찬사까지 가득하다. 바야흐로 출산은 인구 소멸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하는 가장 숭고한 애국의 반열에 올랐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정책과 미디어의 화려한 조명 속에서 가정이란 이름은 그렇게 매번 새롭고 찬란하게 태어난다.
그러나 그 눈부신 빛의 이면이자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깊고 서늘한 그림자 속에서 아주 오래된 인류의 미덕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있다. 바로 효도다.
지하철의 교통약자석이나 노인 무임승차 혹은 명절이면 나오는 자잘한 수당 같은 차가운 경로 우대 제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정이 만들어낸 서류 위의 숫자이자 사회 시스템이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하는 최소한의 기계적 복지일 뿐이다. 내가 목놓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메마른 제도가 아니다. 자식이 부모의 깊은 사랑을 가슴으로 헤아리고 주름진 그 손을 맞잡으며 내리사랑으로 바스러진 부모의 온 생애에 감사와 정성을 다해 보답하는 인간적인 도리다. 즉 우리의 뼈대이자 뜨거운 피였던 효라는 가슴 미어지는 서사의 실종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를 넘어 서글픔이 밀려온다. 국가는 그토록 거액의 예산을 쏟아부으며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고 등을 떠밀면서 정작 그 가정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뿌리이자 가장 아름다운 종착지인 부모를 공경하는 문화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데려오는 일에는 온갖 찬사와 보상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작 나라는 한 인간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길러내기 위해 평생을 갈아 넣은 노부모를 귀하게 대하는 일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자식 된 자들이 알아서 해야 할 당연하고도 사적인 의무로 치부해 버릴 뿐이다.
이 거대한 침묵 속에서 오늘날의 부모들은 슬프고도 위대한 선택을 했다. 현대의 부모 세대는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각자의 독립된 삶을 살자고 먼저 손을 흔든다.
“우리는 우리끼리 잘 지내니 너희나 신경 써라.”
“피곤할 텐데 애들 학원 빠지면서 굳이 올 것 없다.”
“아끼고 우리 애기들 더 예쁜 옷이라도 사 입혀라.”
자식들은 이 세련되고 쿨한 배려를 명절날 받아 든 보너스처럼 반갑게 가슴에 품는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적인 가족의 정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른 척하고 싶은 것일까.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이 하는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그들은 늘 목이 메어 오는데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 괜찮다는 세 글자는 부모가 평생을 걸쳐 자식에게 부려온 가장 슬프고 위대한 거짓말이다. 그것은 본심이 아니라 내 아이의 삶에 조금의 무게도 더 얹고 싶지 않아 밤마다 홀로 삭여낸 눈물겨운 독백이다. 자식이 걱정할까 봐 깊어지는 기침 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숨기고 자식의 지갑이 얇아질까 봐 가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을 기억에서 지우며 자식의 귀한 시간을 뺏을까 봐 깊어가는 밤의 외로움을 독거의 방 구석에서 홀로 집어삼키는 노부모만의 서글픈 사랑의 언어다. 자식이 전화를 끊자마자 적막해진 거실에서 쓸쓸히 불을 끄는 부모의 뒷모습을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진짜 비극과 추악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오늘날의 자식들은 부모의 이 눈물겨운 거짓말을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이기적으로 자신의 면죄부로 삼는다. 독립과 개인주의 그리고 각자의 삶이라는 세련된 현대적 가치관의 핑계 뒤로 숨어 부모가 눈물로 삼켜낸 괜찮다는 말을 곧이대로 믿는 척 뻔뻔하게 돌아선다.
부모가 자식을 배려해 거리를 두려 할 때 자식은 그 거리감이 자아내는 부모의 시린 외로움을 읽어내고 먼저 다가가 그 문을 부수고 들어갔어야 했다. 부모가 돈 쓰지 마라며 손사래를 칠 때 그 손에 패인 주름과 굳은살을 보며 눈물 흘리고 더 좋은 것을 쥐여드렸어야 했다. 부모의 배려가 온몸이 부서져라 자식을 바치는 내리사랑이라면 자식은 그 배려를 핑계 삼아 부모를 홀로 늙어가게 방임하는 비겁함을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지금 독립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언론과 미디어는 이 자식들의 비겁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효도라는 단어가 젊은 세대에게 부양의 부담을 지우고 죄책감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방송과 광고에서 이 단어를 지질하고 낡은 것으로 몰아세우며 세련되게 거세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엄마 아빠랑 함께하는 힐링이나 시니어 웰니스 케어 같은 가볍고 트렌디한 마케팅 용어들을 채워 넣었다.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 그 숨겨진 주름 사이에 고인 눈물을 자식이 어떻게 닦아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건강한 서사와 귀감은 미디어에서 완전히 추방당했다. 우리는 그렇게 부모를 향한 애틋함마저 상품으로 소비하는 가치의 진공 상태에 갇혀버렸다.
정부는 돈 몇 푼과 효율적인 돌봄 시스템으로 그 거대한 영혼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노인 장기요양보험을 확대하고 돌봄 매니저를 파견했으니 국가가 할 일은 끝났다는 식이다. 하지만 국가가 쥐여주는 기초연금 몇 푼이 자식의 따뜻한 손길과 체온을 대신할 수 없으며 요양보호사의 친절한 기계적 돌봄이 자식의 달콤한 목소리를 기다리는 부모 가슴속의 근원적인 쓸쓸함을 지울 수는 없다. 복지가 차가운 사회적 계약이자 제도의 영역이라면 효도는 뜨거운 인간의 가슴과 피가 통하는 행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지를 뻗어내고 파릇한 잎을 틔우기 위해 거액의 영양제를 쏟아부으면서도 정작 그 거목을 지탱하고 있는 늙고 썩어가는 뿌리는 괜찮다는 말 한마디에 차갑게 방치하는 사회다. 부모가 지어낸 눈물겨운 거짓말을 방패 삼아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자식들이 가득한 이 땅에서 그렇게 태어난 새로운 가정이 과연 얼마나 건강하게 사랑을 배우며 지속될 수 있을까. 부모를 버리는 법을 은연중에 배운 아이들이 자라나 이룰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이겠는가.
효도라는 단어가 사라진 거리는 뼈가 시리도록 서글프다. 단어가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인간다운 마음의 온도가 식었다는 뜻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미디어가 지워버리고 국가가 외면한 효도라는 소중한 문장을 우리의 일상과 가슴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복원해야 한다.
부모의 괜찮다는 말속에 감춰진 깊은 앓는 소리와 사무치는 외로움을 기어코 찾아내어 읽어내는 것과 그 눈물겨운 거짓말을 와락 껴안아 부수고 “제가 안 괜찮아서 왔습니다”라며 한 번 더 그 주름진 손을 맞잡는 것이다. 그것이 독립이라는 비겁한 핑계 뒤에 숨어 부모의 사랑을 갉아먹고 살던 우리 자식 세대가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시작해야 할 진짜 각성이자 이 땅에 다시 흐르게 해야 할 효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