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길

2026년 07월 28일

위태로운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10대 시절의 낡은 방어기제 뒤로 숨어버리는 우리들. 왜 우리는 위기 앞에서 늘 비효율적인 옛 방식을 고집할까.

사람은 위기 앞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보다 익숙한 길로 되돌아가곤 한다. 학교 시험에서 난생처음 등수 하락을 맞닥뜨렸을 때, 더 효율적인 공부법을 고민하기보다 굳이 잠을 줄여가며 밤을 새우던 학창 시절의 우리처럼 말이다.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 사이에 오해가 생겼을 때 먼저 다가가 사과하는 대신 며칠 동안 입을 꾹 닫아 회피했던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위태로운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침묵의 방식을 고수하려 든다.

이는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고 끊임없이 안내해도 익숙한 길만 고집하는 운전자와 같다. 더 멀고 교통 체증이 심하다는 걸 알면서도 원래 가던 길로 핸들을 꺾는 것이다. 우리 일상 속에도 이와 닮은꼴이 있다. 우리가 매일 쓰는 컴퓨터 자판이다. 글자 입력 효율이 높고 오타가 적은 세벌식 자판이 이미 개발되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굳이 새로운 배열을 익히는 대신 기왕에 손에 익은 두벌식 자판을 국가 표준으로 지정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처럼 10대 시절에 굳어져 버린 오래된 자판 배열 같은 경로가 존재한다. 완벽한 발표에 대한 불안감으로 결국 보건실로 도망쳐버리던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중요한 조별 발표를 앞두고 연락을 끊는 회피형 인간이 된다. 단짝 친구의 관계에 질투를 느껴 말없이 메신저 프로필을 차단하던 아이는 직장에서 서운한 일이 생기면 대화로 푸는 대신 침묵 속에서 눈치만 주는 수동적 공격성을 취한다. 친구들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어차피 저 무리는 나랑 안 맞아”라며 교실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냉소하던 버릇도 마찬가지다.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살아남으려고 몸에 익힌 생각들이 있다. 먼저 고개를 숙이면 만만해 보여서, 어차피 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서 등등 같은 감정의 경직성은 과거 학창 시절의 낡은 방어기제를 당연시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만든 닫힌 교실 벽만 바라보느라, 그 담장 너머에 더 열린 세상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망각하는 셈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공간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학창 시절의 기억이 불러온 해묵은 불안으로 마음이 경직되는 날이면, 일부러 일상의 모든 감각을 낯설게 재배치했다. 우선 늘 걷던 길의 반대편 보도로 발걸음을 옮기거나 한 블록 뒤의 생소한 골목길로 돌아 걸었고, 매일 무심코 지나치던 간판의 글자를 거꾸로 읽었다. 이어폰으로는 뜻을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는 이국적인 낯선 외국어 라디오 방송을 틀어 의미 없는 단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카페에 앉아 평소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이름 모를 차를 시켜 놓고 얼음이 혀끝에서 천천히 녹아내리는 온도의 변화에 집중했다.

의도적으로 낯선 풍경을 시선에 담고, 해석이 불가능한 자극에 뇌를 노출하며, 미각의 해상도를 높이는 동안 무의식의 궤도를 따라 관성적으로 흘러가던 10대 시절의 감정적 습관에 제동이 걸린다. 오감을 다르게 깨우는 행위가 훌륭한 움직이는 명상이 될 수 있듯, 굳어 있던 감각을 새롭게 쓰는 것 자체가 마음의 요가가 되고 명상이 된다. 이 작고 낯선 서툶들이 교실에서부터 고착된 반응 패턴을 깨뜨리고 더 넓은 시각을 열어젖힌다.

성적표를 받고 화가 날 때마다 제자리에 앉아 손톱을 뜯던 아이가 교정 밖으로 나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 친구의 말 한마디에 슬퍼져 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있던 아이가 매점으로 걸어가 따뜻한 음료를 마시는 것도 본질적으로 같은 방법이다. 몸도 마음도 우리가 사는 세상도 학창 시절의 그 교실에 멈춰 있지 않고 끝없이 변한다. 변해버린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과거의 익숙한 상처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반응을 새롭게 선택하는 것뿐이다. 익숙한 오감의 방향을 잠시 내려놓는 작은 시도만으로도 우리의 삶에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소중한 공간이 열리기 시작한다.